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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2일(월)~16일(금) 
전능자의 그늘

월요일
마태복음 십이장 구절에서 십삼절.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건강하게 되었더라.
첫째  예수님은 형식보다 사람의 영혼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적인 예배의 규례를 존중하셨고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예수님을 믿기보다 종교적인 형식만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의 형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 능력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회중 가운데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을 보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사람의 고통보다 예수님을 고발할 기회를 찾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악의 때문에 자신의 긍휼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구덩이에 빠진 한 마리의 양처럼 보셨습니다. 그리고 사실 모든 인류가 죄와 죽음이라는 깊은 구덩이에 빠진 양과 같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약함을 볼 때 그 사람의 잘못부터 찾습니까, 아니면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영혼으로 바라봅니까? 잠시 시간을 내서 묵상하겠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완악한 마음을 보시고 슬퍼하십니다
마가는 예수님께서 원수들을 향하여 분노하시면서도 그들의 마음이 완악한 것을 슬퍼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고쳐 주시면 자신의 영광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선한 일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무서운 완악함입니까? 그런데 오늘날에도 복음의 능력을 막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은 마른 손처럼 무력해진 영혼을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복음이 자신들의 명예나 생각이나 종교적인 형식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여 복음을 거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완악함을 보시고 단순히 화만 내시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십니다. 나의 마음에도 하나님의 선한 일을 가로막는 완악함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잠시 시간을 내서 묵상하겠습니다.


셋째  “손을 내밀라”는 명령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손이 마른 것이 바로 그의 병이었습니다. 그는 손을 내밀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미 여러 번 손을 내밀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왜 다시 하라고 하십니까?”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복음도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명령합니다. “회개하라. 믿으라.”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 힘만으로는 참된 회개와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마음은 완고하고 생각은 어둡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명령하시면서 동시에 그 명령에 순종할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는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주님의 명령을 거절해서는 안 됩니다. 손을 내밀 수 없었던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손을 내밀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회개하고 믿어야 합니다. 나는 내 힘으로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주님의 명령을 포기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잠시 시간을 내서 묵상하겠습니다.


주님, 저희의 굳은 마음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종교적인 형식만 가지고 있으면서 주님의 긍휼을 잊지 않게 하소서. “회개하라, 믿으라”는 주님의 명령을 들을 때 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지 않고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순종하게 하소서. 마른 손을 고치신 주님께서 저희의 죽은 영혼과 굳은 마음도 새롭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화요일
마태복음 십이장 십사절에서 이십일절.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첫째  예수님은 박해를 피하면서도 선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원수들의 질문에 대답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책망하셨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적개심을 없애지는 못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답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을 미워할 수는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 것인지 의논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악의가 자신에게 닥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계속 맞서 싸우기보다 다른 곳으로 물러가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박해를 받을 때 피하는 것이 항상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디로 가시든지 계속해서 하나님을 섬기셨습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왔고, 주님께서는 그들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박수와 군중의 환호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죄로 인해 떨며 주님께 나아오는 사람의 간구와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의 사랑을 기뻐하셨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인정과 박수보다 고통받는 영혼에게 선을 행하는 일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잠시 시간을 내서 묵상하겠습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온유한 구주이십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예수님의 성품을 놀랍게 보여 줍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상한 갈대는 이미 부러져 거의 쓸모가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불꽃도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연기만 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영혼의 첫 소원도 이와 같습니다. 처음에는 작은 불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죄를 깨닫고 하나님을 찾고 싶은 마음이 아주 희미하게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작은 소원을 꺼버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그 불씨에 바람을 불어넣어 불꽃으로 만드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땅에 계실 때에도 온유하셨고, 지금 하늘에 계신 지금도 동일하게 온유하십니다. 나는 나의 믿음이 너무 약하고 나의 마음이 너무 상했다는 이유로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주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잠시 시간을 내서 묵상하겠습니다.


셋째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 지금도 죄인을 위해 간구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영원한 구원의 언약에 대한 놀라운 모습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우리의 타락을 아셨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독생자를 구원자로 정하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기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내가 왔나이다.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오셨고 하나님의 종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맡기신 구원의 일을 완성하신 후 하늘에 올라가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중보자로서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죄인의 구원을 간구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반드시 승리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아직 모든 민족이 주님께 돌아오는 그 영광스러운 날은 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날을 기다리며 주님을 신뢰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는 온유한 구주께서 지금도 우리를 붙드시고 계십니다. 나는 나의 연약함보다 나를 위해 일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 바라보고 있습니까? 잠시 시간을 내서 묵상하겠습니다.


주님,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온유하신 구주를 바라봅니다. 저희의 작은 믿음을 붙들어 주시고, 연약한 마음을 버리지 마소서. 세상의 박수보다 죄인의 영혼을 사랑하게 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끝까지 신뢰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수요일
누가복음 육장 십이절에서 십육절.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첫째  예수님께서도 밤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셨지만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계셨고 피곤함과 지침을 경험하셨습니다. 그런데 열두 사도를 선택하시는 중요한 일을 앞두고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기도생활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아침과 저녁에 몇 분이나 기도합니까? 기도하면서도 마음은 온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 마음을 쏟아 놓는 즐거운 교제라고 생각하기보다 힘든 의무처럼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설령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만큼 많이,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자신의 약속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더욱 열심히 간구하고 간청한다면 얼마나 많은 은혜를 경험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바쁘다는 이유와 피곤하다는 이유로 기도를 미룹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까? 나는 예수님께서 밤새 기도하신 모습을 보면서 나의 기도생활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있습니까? 잠시 시간을 내서 묵상하겠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위해 기도하셨고, 우리도 일꾼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날 밤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는지는 다음 날의 일을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침이 되자 제자들 가운데서 열둘을 선택하여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마도 그들의 사역과 그들이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구원하게 될 일을 위해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 기도의 열매로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의 복이 흘러갔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교회 건물을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거룩한 목회자를 교회에 세우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셔야 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사람들의 영혼을 망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로 양 떼를 먹일 목회자를 보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나는 우리 교회의 목회자들과 교회의 일꾼들, 그리고 세계의 복음 전도자들을 위해 실제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잠시 시간을 내서 묵상하겠습니다.


셋째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사역보다 먼저입니다
열두 사도는 즉시 사역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가복음 삼장 십사절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세우신 목적이 먼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그다음에 보내어 전도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역자에게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는 사람은 먼저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몇 사람은 어부였고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들은 훗날 복음을 강력하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는 가룟 유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유다가 자신을 배반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왜 그런 사람을 열둘 가운데 선택하셨을까요? 시편 사십일편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동시에 유다는 매우 엄숙한 경고가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고, 밤낮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종교적인 사람처럼 보이며 거룩한 교리를 전할 수도 있지만 결국 멸망할 수 있습니다. 백스터는 젊은 시절 자신보다 더 열심 있어 보였던 친구가 함께 기도하고 권면하다가 결국 믿음을 저버렸던 일을 말합니다. 이런 일을 들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우리 자신을 지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보다 먼저 주님과 함께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잠시 시간을 내서 묵상하겠습니다.


주님, 예수님께서 밤새 기도하신 모습을 보며 저희의 게으른 기도를 회개합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게 하시고, 교회에 거룩한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모든 목회자와 복음의 일꾼들이 먼저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고, 저희도 다른 사람을 섬기기 전에 주님과 깊이 교제하게 하소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도록 저희를 붙들어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목요일
누가복음 육장 십칠절에서 십구절.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첫째  예수님께서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서 물러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 기도하신 후 열두 사도를 선택하셨고, 산에서 내려오셔서 평지에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곳에는 엄청난 고통이 있었습니다. 말하지 못하던 사람이 있었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있었으며, 병든 자녀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 있었습니다. 귀신에게 고통받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고치셨습니다. 그 결과 그곳에는 놀라운 기쁨이 생겨났습니다. 말하지 못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걷지 못하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며, 병들었던 아이들이 건강을 되찾고, 귀신에게 괴롭힘을 받던 사람들이 온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의 변화는 복음이 사람의 영혼에 행하는 더 큰 일을 보여 주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복음이 능력 있게 전해지는 곳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하던 입술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하나님의 길을 걷지 못하던 사람이 주님의 길을 걷게 되며, 하나님을 떠났던 자녀가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이 일어납니다. 나는 예수님의 능력이 나의 영혼에도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음을 믿고 있습니까? 잠시 시간을 내서 묵상하겠습니다.


둘째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의 비참함을 향하여 흘러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능력이 많으셨기 때문에 사람들을 고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에게는 고통받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많은 불행한 사람을 보면 쉽게 지치고 싫증을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은 나병환자의 손길을 피하지 않으셨고, 귀신 들린 사람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사람의 비참함을 향해 흘러갔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멸시하는 사람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주님께서는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가난한 사람의 초라한 집에도 주님은 찾아가시고, 감옥에 있는 죄수도 고통 가운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주님께서 들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간다면 화려한 저택과 궁전에서 인정받는 것보다 고통받는 사람을 돌보는 일을 더 기뻐해야 합니다. 교도소에 있는 사람을 위해 살았던 하워드, 노예 해방을 위해 힘썼던 윌버포스, 공장 노동자였던 어린이들을 위해 일했던 애슐리처럼 세상에 알려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사랑을 따라 고통받는 사람을 돌보았습니다. 한 가난한 그리스도인 여인은 어느 날 밤 문 앞에 찾아온 가난하고 거의 지능이 없던 한 여인을 그리스도 때문에 받아들였습니다. 그녀는 해마다 자신의 손으로 일하여 그 사람을 먹이고 상처를 치료해 주었으며 눈물로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오늘 누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을 수 있겠습니까? 잠시 시간을 내서 묵상하겠습니다.


셋째  육체의 치료보다 영혼의 구원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 평지에 모인 사람들은 병을 고침받기 위해서만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도 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병이 고침받은 사람들은 얼마나 감사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겠습니까? 기적을 본 사람들은 얼마나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만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 기적보다 더 큰 것은 죄인이 복음을 듣고 영혼이 구원받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의 몸만 건강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도 단지 그 사람의 육체적인 필요만 채워 주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 영혼이 그리스도를 알고 구원받도록 기도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 나는 다른 사람의 육체적인 필요만 바라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사람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도 마음을 쓰고 있습니까? 잠시 시간을 내서 묵상하겠습니다.


주님, 수많은 고통받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긍휼을 베푸신 주님의 사랑을 감사합니다. 저희도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고통받는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육체의 필요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더욱 귀하게 여기게 하시고, 복음의 능력이 온 세상에 전해져 많은 죄인이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금요일
마태복음 오장 일절에서 십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첫째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행복은 세상이 말하는 행복과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을 고쳐 주시는 일을 하신 후 산에 올라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분은 입을 열어 복을 선언하셨습니다. 이 여덟 가지 복은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을 행복하고 복된 사람으로 여기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행복을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행복하려면 세상의 좋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집과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이 복이 있다. 건강하고 오래 사는 사람이 복이 있다. 사람들에게 명예와 평판을 얻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데서 발견됩니다. 시편은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라고 말하며, 또 “내가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거룩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겸손과 회개와 온유함과 영적인 갈망과 긍휼과 순결과 화평을 이루는 마음과 박해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은혜를 주십니다. 나는 행복을 세상의 조건에서 찾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을 닮아가는 데서 찾고 있습니까? 잠시 시간을 내서 묵상하겠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온유함과 긍휼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옵니다
세상에도 본래 성격이 온유한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쉽게 화를 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온유함과 그리스도인의 온유함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욕을 느끼지 못해서 온유한 것이 아닙니다.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참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온유합니다. 자신이 실제로 받아야 할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온유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구주께서 자신을 위해 훨씬 더 큰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온유합니다. 다윗이 시므이에게 저주를 받았을 때 그는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온유함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은 온유함입니다. 긍휼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래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진정으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람의 육체뿐 아니라 그 영혼을 불쌍히 여깁니다. 나는 내가 하나님께 받은 긍휼을 기억하면서 다른 사람의 약함과 죄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잠시 시간을 내서 묵상하겠습니다.


셋째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본래부터 순결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마음이 깨끗하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더 이상 죄를 즐거워하지 않고 하나님처럼 거룩해지기를 원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화평하게 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본래 다툼을 싫어하고 평화를 좋아할 수 있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참된 화평을 이루는 올바른 동기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이 서로 갈라지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깨어진 사랑의 끈을 다시 연결하려고 합니다. 로버트 홀과 찰스 시므온이라는 두 목회자가 서로 다투어 말을 하지 않았을 때, 존 오웬은 두 사람에게 화해를 권하는 글을 각각 남겼습니다. 그 글을 읽은 두 사람은 서로를 찾아갔고 길에서 만나 화해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화평을 이루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또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죄가 전혀 없는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기 시작하는 것을 뜻합니다. 북아메리카의 에스키모 소년이 마태복음을 읽다가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말씀을 읽고 자신은 마음이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없을 것이라며 울었습니다. 선교사는 그에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는 말씀을 다시 보여 주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슬퍼하는 바로 그 마음이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려 준 것입니다. 나는 나의 죄 때문에 애통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정결함과 위로를 구하고 있습니까? 잠시 시간을 내서 묵상하겠습니다.


주님, 세상이 말하는 행복이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복을 구하게 하소서. 심령이 가난하게 하시고 죄를 애통하게 하시며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하소서. 하나님께 받은 긍휼을 기억하며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게 하시고, 마음이 청결하며 화평하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일은 예배만 드리는 날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배만 드리는 곳이 아닙니다. 주일은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교우들이 함께 모여 최대한 많은 시간 함께 살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아름다움과 능력을 경험하고 밖으로는 그것을 드러내는 날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각 지체가 자기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며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혜를 다른 지체에게 공급하고 다른 지체에게서 동일한 것을 공급 받으며 함께 살아가는 곳입니다. 성경적인 교회는 예배만 잘 드리는 교회가 아니라 함께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과 능력을 경험하고 드러내는 교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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